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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질 운명과 영원히 남을 운명, 책이 걷는 서로 다른 길

서점 한 켠에서 마주한 운명의 갈래길

낡은 서점에서 발견한 두 권의 책

며칠 전 동네 헌책방을 둘러보다가 흥미로운 광경을 목격했다. 먼지가 수북히 쌓인 책장 맨 아래 칸에 두 권의 책이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하나는 표지가 너덜너덜해져서 제목조차 흐릿하게 보이는 고전 소설집이었고, 다른 하나는 몇 년 전 베스트셀러였던 자기계발서였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이 두 책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이 얼마나 다를까 생각하니 묘한 감정이 들었다.

서점 사장님께 물어보니 그 고전 소설집은 벌써 세 번째 주인을 찾아온 책이라고 하셨다. “이런 책들은 말이야, 읽는 사람마다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거든. 그래서 계속 살아남는 거지.” 반면 베스트셀러였던 자기계발서는 한때 날개 돋친 듯 팔렸지만 이제는 중고서점에서도 찾는 사람이 드물다고 했다. 시대의 흐름과 함께 사라져가는 책들의 운명이 이런 것일까?

그날 밤 집에 돌아와서 내 서재를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책장 위쪽에는 시간이 지나도 계속 꺼내보는 책들이, 아래쪽에는 한 번 읽고 다시는 펼치지 않은 책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떤 책은 영원히 기억되고, 어떤 책은 시간의 뒤안길로 사라져간다. 이 차이는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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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걸러내는 책들의 진짜 가치

20년 넘게 책과 함께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진짜 좋은 책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빛을 발한다는 사실이다. 대학생 때 처음 읽었던 카뮈의 ‘이방인’을 30대에 다시 읽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다. 같은 문장인데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왔으니까.

요즘 온라인 서점에서는 알고리즘이 내 취향에 맞는 책을 추천해준다. 편리하긴 하지만 때로는 이런 시스템이 우리를 특정한 틀 안에 가둬두는 건 아닐까 싶다. 예상치 못한 책과의 만남, 그런 우연한 발견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아서 아쉽다. 알라딘이나 예스24 같은 곳에서 책을 주문할 때도 비슷한 장르의 책들만 계속 추천받게 되더라.

하지만 정말 오래 살아남는 책들은 이런 트렌드와 상관없이 자신만의 길을 간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400년이 넘도록 여전히 읽히는 이유가 뭘까? 단순히 교육과정에 포함되어서일까? 아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감정과 갈등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들이 결국 살아남는다.

디지털 시대가 바꾼 책의 운명

요즘 젊은 친구들을 보면 종이책보다 전자책을 더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편리하고 공간도 차지하지 않으니까. 나도 처음엔 거부감이 있었는데, 막상 써보니 장점이 적지 않더라. 특히 여행갈 때는 정말 유용하다. 하지만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전자책으로 읽은 책들은 왠지 기억에 덜 남는 것 같다. 손으로 페이지를 넘기고, 책의 무게를 느끼고, 종이 냄새를 맡는 그런 경험들이 책을 더 깊이 기억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물론 이건 개인차가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킨들이나 리디북스 같은 플랫폼에서 읽은 책들보다 서점에서 직접 골라서 산 종이책들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디지털 시대가 오히려 어떤 책들에게는 새로운 기회를 주고 있다는 점이다. 절판되었던 고전들이 전자책으로 다시 출간되면서 새로운 독자들을 만나고 있으니까. 예전엔 구하기 어려웠던 책들을 이제는 클릭 몇 번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기술의 발전이 책의 운명을 어떻게 바꿔놓을지 정말 궁금하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책의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전환점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의 흔적이 남긴 서로 다른 이야기

종이가 말하는 생명의 한계

그날 이후로 종이의 운명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됐다. 사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대부분의 책들은 산성지로 만들어져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누렇게 변하고 부스러지기 마련이다. 특히 1950년대 이후에 대량생산된 책들이 그런데, 당시엔 빠르고 저렴한 제작이 우선이었으니까.

내 서재에 있는 80년대 소설책 몇 권을 꺼내서 살펴봤더니 정말 그랬다. 페이지 모서리가 바스락거리고, 살짝만 힘을 줘도 찢어질 것 같은 상태였다. 반면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일제강점기 시절 책은 오히려 더 단단했다. 그땐 좋은 종이를 썼나보다.

요즘엔 전자책이 대세라고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종이책의 촉감을 좋아한다. 다만 이런 현실을 보면서 조금씩 생각이 바뀌고 있긴 하다. 아무리 애착이 있어도 결국 사라질 운명이라면?

디지털 세상 속 영원한 보관소

며칠 전 도서관 사서인 친구를 만났을 때 이런 얘기를 들었다. 요즘 도서관들이 귀중한 자료들을 디지털화하는 작업에 한창이라고. 특히 지역 향토사료나 오래된 신문, 잡지 같은 것들 말이다. PDF파일로 만들어서 서버에 저장해두면 반영구적으로 보존이 가능하다니까.

“그런데 그게 정말 영원할까?” 하고 물어봤더니 친구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완전히 영원하다고 할 순 없지만, 적어도 종이보다는 훨씬 오래갈 거야. 게다가 복사본을 여러 곳에 만들어둘 수도 있고.”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구글 드라이브나 네이버 클라우드 같은 곳에 저장해두면 내 컴퓨터가 고장 나도 괜찮으니까. 실제로 나도 중요한 자료들은 여러 곳에 백업해두는 편이다.

하지만 뭔가 아쉬운 기분도 든다. 화면으로 보는 글자와 종이 위의 글자는 느낌이 다르잖아. 특히 밤늦게 책을 읽을 때 그런 차이를 많이 느낀다.

작가와 독자 사이의 새로운 연결고리

최근에 한 작가의 인터뷰를 읽다가 인상 깊은 구절을 발견했다. “종이책은 물리적으로는 사라지지만, 디지털북은 데이터로 영원히 남는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독자의 마음속에 남는 이야기다.”

맞다. 결국 책의 진짜 가치는 매체가 아니라 내용에 있는 거 아닐까. 내가 어릴 때 읽었던 『어린왕자』는 이미 너덜너덜해져서 버렸지만, 그 안의 문장들은 아직도 기억나니까. “정말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라는 말처럼.

요즘 젊은 작가들은 처음부터 전자책으로 출간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출판비용도 적게 들고, 독자들과 소통하기도 쉽다고. 실제로 몇몇 웹소설 플랫폼에서 연재되는 작품들을 보면 댓글로 작가와 독자가 실시간으로 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사라질 운명과 영원히 남을 운명이 꼭 대립하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디지털 시대가 바꾼 책의 새로운 운명

전자책이 가져온 영원함의 착각

요즘 지하철에서 킨들이나 태블릿으로 책을 읽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나도 한때 전자책의 편리함에 빠져서 아이패드에 수십 권의 책을 담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정말 혁신적이라고 생각했다. 무거운 책을 들고 다닐 필요도 없고, 어둠 속에서도 읽을 수 있고, 검색까지 가능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몇 년 전 충격적인 일을 겪었다. 자주 이용하던 전자책 플랫폼에서 갑자기 서비스를 종료한다는 공지가 온 것이다. 그동안 구매했던 책들이 모두 사라질 위기에 처했고, 다행히 다른 플랫폼으로 이전할 수 있었지만 일부 책들은 영영 접근할 수 없게 됐다. 그순간 깨달았다. 디지털 책의 영원함은 착각이었다는 걸.

클라우드 저장소 속 책들의 불안한 미래

구글 드라이브나 드롭박스 같은 클라우드 서비스에 PDF 파일로 저장해둔 책들도 마찬가지다. 언뜻 보면 영구적으로 보관될 것 같지만, 서비스 정책이 바뀌거나 계정에 문제가 생기면 한순간에 모든 게 사라질 수 있다. 실제로 내 친구는 구글 계정이 해킹당해서 몇 년간 모아둔 자료들을 모두 잃었다고 하더라.

더 심각한 건 파일 형식의 문제다. 10년 전에 유행했던 파일 포맷들 중에 지금 열어볼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지금 당장은 PDF나 EPUB이 표준처럼 느껴지지만, 20년 후에도 같은 방식으로 읽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기술의 발전은 때로는 과거를 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니까.

그래서 요즘엔 정말 소중한 책들은 종이책으로도 따로 구매해두고 있다. 디지털의 편리함을 포기하기는 아쉽지만, 적어도 물리적인 형태로 남아있으면 언제든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독립출판과 소량인쇄가 만든 새로운 희귀서

최근 몇 년 사이 독립출판 문화가 크게 번성했다. 북페어에 가보면 작가들이 직접 만든 소량 한정판 책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책들은 처음부터 희귀본으로 태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00부, 200부 정도만 인쇄해서 판매하고 나면 그걸로 끝이니까.

얼마 전 홍대 근처 작은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시집이 있었다. 표지부터 내지까지 모든 걸 작가가 직접 디자인하고 손으로 제본한 책이었는데, 전체 30부만 만들었다고 했다. 가격은 일반 시집보다 비쌌지만 망설이지 않고 샀다. 이런 책은 놓치면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 테니까.

온디맨드 인쇄 기술 덕분에 이런 소량 출간이 가능해졌지만, 역설적으로 이 때문에 더 많은 책들이 빠르게 절판되고 있다. 대형 출판사들도 재고 부담을 줄이기 위해 초판 부수를 줄이고, 판매량이 저조하면 바로 절판시켜버린다. 예전처럼 창고에 쌓아두고 몇 년씩 기다려주는 여유가 없어진 거다.

이렇게 보면 디지털 시대의 책들은 겉으로는 영원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더욱 불안정한 운명을 타고났는지도 모르겠다.

책과 함께 걸어온 길, 그리고 앞으로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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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만들어가는 진짜 영원함

결국 깨달은 건, 책의 진짜 운명은 물리적인 형태나 디지털 저장소에 달린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지난주 동네 카페에서 우연히 들은 대화가 이를 확실하게 해줬다. 한 중년 여성이 친구에게 “어릴 때 읽었던 그 책 제목이 뭐였지? 주인공이 빨간 머리였는데…”라고 물어보고 있었다. 책 제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 이야기는 여전히 그녀 안에 살아 숨쉬고 있었다.

이게 바로 책이 가진 가장 신비로운 능력이 아닐까? 종이가 바스러지고 파일이 삭제되어도, 한번 독자의 마음에 들어간 이야기는 그 사람의 일부가 되어 계속 살아간다. 때로는 변형되고, 때로는 다른 이야기와 섞이면서 말이다. 내가 어릴 때 읽었던 “어린왕자”의 몇몇 대사들이 지금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처럼.

그래서 요즘은 북클럽 활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매월 한 권씩 정해서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같은 책을 읽어도 사람마다 완전히 다른 감상을 갖고 있어서 놀랍다. 어떤 이는 주인공의 선택에 공감했고, 다른 이는 그 선택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하나의 책이 열 명의 독자를 만나면 열 개의 다른 책이 되는 셈이다.

가끔 온라인 서점에서 리뷰를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같은 책에 대해 별점 5개를 준 사람과 별점 1개를 준 사람이 정말 같은 책을 읽은 게 맞나? 하지만 이것도 책이 가진 힘의 일부다. 독자의 경험과 감정, 그 순간의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

전해지는 이야기의 힘

얼마 전 조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추천 도서 목록을 들고 와서 뭘 읽어야 할지 물어봤다. 그때 문득 내가 그 나이에 읽었던 책들이 떠올랐다. “데미안”이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책들 말이다. 지금 읽으면 좀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당시엔 정말 큰 위로가 되었던 책들이었다.

조카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니까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더라. “삼촌도 그런 책을 읽었어요?” 하면서. 그 순간 깨달았다. 책은 이렇게 세대를 이어가며 전해지는구나. 내가 읽었던 감동이 조카에게도 전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책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진 셈이다.

요즘은 SNS에서도 책 추천 글들을 자주 본다. 인스타그램의 북스타그램이나 유튜브의 북튜버들이 책을 소개하는 모습을 보면, 예전 서점 직원이 손님에게 책을 권하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매체만 바뀌었을 뿐, 좋은 책을 나누고 싶어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나만의 책 보관법을 찾아서

이런 깨달음을 얻고 나니 책을 대하는 태도도 조금씩 바뀌었다. 예전엔 책장이 가득 차면 어떤 책을 버릴지 고민했는데, 이제는 어떤 책을 누구에게 선물할지 생각한다. 특히 정말 좋았던 책은 여러 권을 사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한다. 책값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렇게 전해진 책이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경험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모든 책을 다 간직할 순 없다. 그래서 나름의 기준을 만들었다. 다시 읽고 싶은 책,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그리고 내 인생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책들만 책장에 남겨두기로 했다. 나머지는 도서관에 기증하거나 헌책방에 팔기도 한다.

전자책도 마찬가지다. 킨들 라이브러리에 수백 권이 쌓여 있지만, 정작 기억에 남는 건 몇 권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은 전자책으로 먼저 읽어보고, 정말 좋은 책만 종이책으로 다시 사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좀 번거롭긴 하지만, 이렇게 하니까 책장에 있는 모든 책이 다 소중하게 느껴진다.

가끔 친구들이 “책을 그렇게 많이 사면 돈이 얼마나 들어가냐”고 묻는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한 권의 책값으로 몇 시간, 때로는 며칠간의 즐거움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그리 비싼 투자는 아닌 것 같다. 영화 한 편 보는 것보다 훨씬 오래가는 경험이니까.

결국 책의 진짜 운명은 우리 각자가 만들어가는 것 같다. 어떤 책은 사라지고 어떤 책은 영원히 남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그 순간 우리가 책과 함께 나누는 시간들이 아닐까.